끄적끄적
1.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계란 스크램블을 만들다가 최근에 본 요리 경연 프로그램들이 떠올랐다.
한국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갔는지는 사실 직접 체감할 일은 없지만 이래저래 따져봐도 국뽕들이 난리치는 만큼은 아니어도 원종이들이 짖는 수준으로 허상은 아니고 꽤나 영향력이 강력해진 상태인에서 지속적으로 우상향하고 있는건 맞는 것 같다.
2.
내 취향에는 냉장고를 부탁해 같은 가볍고 웃긴 코드가 더 마음에 들긴하지만 흑백요리사처럼 진지하게 하는 것도 퀄리티만 보장된다면 괜찮게 본다.
오늘 끄적여보려는 내용은 어찌보면 흑백요리사 시즌2를 보고 난 감상평일수도 있다.
3.
사회적으로, 특히나 한국에서 '엄마'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 중 하나는 '요리 솜씨'다.
한국에선 '엄마의 손맛'이라며 뭔가 신성불가침의 영역같은 뉘앙스로 모든 공격을 회피할 수 있는 막강한 방패로도 쓰인다.
그래서 진짜 요리 실력이 뛰어난 '엄마'들에 대한 평가가 오히려 묻히는 경향이 있다.
우리 엄마가 그 중 하나일 것이다.
4.
우리 엄마는 우리 '엄마'라서 요리를 잘했다는게 아니라 철저히 객관적인 기준에서 봤을 때도 요리 솜씨가 상당히 뛰어난 사람이었다.
어딜 가서 뭘 먹어도 사실상 집에서 먹던 맛보다 딱히 뛰어남을 느낀 적이 없다.
특히 한식 관련해서는 그냥 좀 유명한 가게에서 사먹으면 엄마가 고생 안하시고 식구들이 '편하게 먹는다'는 느낌이지 더 맛있다거나 별미를 먹는다는 느낌은 느낀 적이 없다.
그렇게 입이 고급이 된 상태로 살다보니 외식할 때 찬이나 요리들의 퀄리티가 안 좋다면 입에 대는 즉시 뭐가 잘못됐는지 브리핑이 가능한 사람들이 우리 가족들이라 어디 진짜 애매하거나 어설픈데서 식사대접했다가는 밥 사고 욕먹는 상황 발생하기 딱 좋은 게 우리 집이다.
5.
이쯤에서 조금 더 개인적인 상황들을 추가로 서술해야겠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난 아무래도 태어날 때부터 먹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게 태어났던 것 같다.
젖먹이 때부터 입이 짧아서 부모님께서 늘 걱정이 많았는데 젖을 떼고 밥을 먹을 때도 그랬으니 마음 고생이 심하셨을 것이다.
문제는 그게 강압적인 식사 강요로 이어져 어릴 적 가장 큰 갈등 요소가 됐던 걸로 기억한다.
음식 솜씨 뛰어난 어머니의 입장에선 그게 정말 이해가 안가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이었을 거라는 걸 알게 된 건 내가 군대를 제대했을 때쯤이었다.
난 군대에 가기 전까지 '식도락'이라는 개념을 진짜 우스개로 알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 무슨 짐승 새끼도 아니고 먹는 걸로 행복을 느껴? 단세포야?' 라는게 그전까지의 진짜 솔직한 내 생각이었고 밥은 그냥 삶을 유지시키기 위한 연료 보충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밥먹는 시간도 아까워했었다.
6.
위에 언급했듯 이 모든 건 군대를 가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뭐 군대라는 극한의 변화에 뭘 더 얘기할 게 있냐 싶지만 이 부분에 관해서는 크게 2가지의 변화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연료가 필요할 때(극심한 배고픔) 연료 보충을 맘대로 할 수 없다는 점, 둘째는 연료 퀄리티의 극단적인 변화였다.
애초에 먹는 것에 대한 엄마와의 가장 큰 갈등은 대부분의 가정에서도 그러하겠지만 내가 규칙적으로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컸다.
난 연료가 필요할 때 연료를 후다닥 공급해야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뭐가 그리 바빴는지 잘 모르겠는데 여튼 난 연료가 다 떨어져서 눈이 뒤집히기 전까지는 먹는 거에 관심이 진짜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뭐 딱히 군것질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뭘했는지 모를 바쁜 일을 하는데 식사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는게 너무 싫어서 섭취한 칼로리가 바닥날때까지 버티다가 진짜 이대로면 큰일나겠다 싶을 때 엄청 퍼먹는 식습관이 있었다.
엄마는 이게 건강에 안좋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안타까워 했지만 사실 폭식을 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요즘 유행하는 간헐적 단식의 생활화였었다.
보통 20~26시간 단위로 한 끼를 먹었는데 그렇게 왕창 먹고 다음 끼니 때까지는 진짜 물도 잘 안마시고 간식도 먹지 않았다.
근데 이게 군대가면서 진짜 한순간에 불가능한 구조가 되어 버린거다.
7.
아이러니하게도 퀄리티가 떨어진 것에 대해선 딱히 불만이 없었다.
어차피 칼로리 충전만 되면 돤다 주의였으니...
그리고 의외로 우리 부대의 짬밥 퀄리티가 타 부대 대비해선 상당히 괜찮기도 했었다.
그래봤자 먹는 애들 입에서 "짬밥 x같아서 못먹겠네"하는 얘기는 계속 나왔지만 말이다.
8.
여튼 그렇게 제대를 할 때쯤에는 '사람도 동물이구나' 와 '먹을 걸 먹으면 행복감을 느끼는구나' 라는 걸 체감한다.
그리고 먹는 행위와 맛을 느끼는 것이 어떻게 행복감으로 다가오는지에 대해 재정의를 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맛에 대해 민감하고 섬세하게 맛을 느끼면 더 행복할거라 치부해왔다.
사실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기에 그냥 대충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쨌거나 센서의 성능이 좋은게 더 명확한 분별이 가능하니 '성능이 좋은게 좋겠지'란 생각이었다.
근데 생각을 한 번만 더 해봐도 이게 틀린 판단이란걸 알 수 있다.
맛에 대해 민감하고 어떤 맛인지 섬세하게 구분이 가능하다는 건 그만큼 기준값이 높아져서 만족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직관적이고 간단하게 표현하면 '맛있다'고 느끼려면 꽤나 잘만들어진 요리를 먹어야한다는 거다.
9.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본 '먹는 것'에 관해 양극단을 달리는 인물이 두 명 있다.
둘의 공통점은 먹는 것들 즐긴다는 점이고, 그 외에는 공통된 게 하나도 없다.
한 명은 먹는 것 자체를 엄청 좋아하는 대식가로
이게 장난이 아니고 진짜인 친구였다.
실제로 상한 김치찌개와 쉰 밥을 먹고도 멀쩡했으며 심지어 먹을 때 그 음식들이 상했는지도 모르고 먹는 친구였다.
다른 양극단에 위치한 사람은 나랑 혈연관계에 있는 외가쪽 할머니셨다.
이 분은 요리 솜씨에 그렇게 깐깐한 우리 엄마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능력자셨다.
아주 오래 전부터 원재료를 따지신지 거로 안다.
철되면 직접 수배한 농가들 돌아다니시면서 그 해 나온 것 중 가장 좋은 거로 선별해서 구매하고 다니셨고 가끔씩 많이 구할 수 있는 경우엔 우리 엄마한테도 연락을 주셔서 같이 구매하시기도 했다.
혀의 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시니 음식도 엄청 정갈하고 깔끔하게 잘 만드신다.
젊으실 적 뛰어난 본인의 요리 실력을 온 사방에 퍼트리며 즐거운 식도락 생활을 즐기셨다.
10.
이제 이 장황한 얘기를 왜 했는지 대충 눈치 챌 수 있을 거다.
9에 언급한 대식가와 미식가 할머니 중 먹는 것에 행복감을 느끼는 건 어느 쪽일까?
너무 극단적으로 치우치는건 좋지 않지만 대식가의 경우 그냥 먹을 것만 많이 주면 그 자체로 행복감을 느낀다.
반면 미식가 할머니는 이제 연로하셔서 직접 본인이 재료부터 구하고 요리하시기에는 힘에 부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대충 해먹거나 적당한데 가서 외식을 하려면 본인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해서 불만족스럽다.
이게 어떤 취향이나 취미처럼 가끔씩 경험해도 되는 거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항에 높은 기준이 붙어버리니 이건 진짜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이걸 보고 난 그냥 '입이 싼게 축복이구나' 싶었다.
11.
경제적으로 아주 풍족하다면 또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집에 자신의 입맛에 맞는 요리사를 고용하고 재료부터 모든 걸 맡기면 될테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얼마나 큰 경제적 비용을 감당해야할지는 말안해도 알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감당 못할, 혹은 돈이 있어도 안 할 선택이기도 하다.
12.
그냥 쉽고 맛있게 계란 스크램블 하려고 계란푼 물에 맛소금 쳐넣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포스팅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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